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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명가의 유산 키에프 카메라의 역사

빛의 도둑 2018. 3. 5.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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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가의 유산 키에프 카메라의 역사

키에프 레인지파인더

by Peter Hennig
(출처: www3.telus.net/public/rpnchbck/zconrfKiev.htm)


[사진] 전전 자이스 콘탁스 III 신품

새롭게 생산된 전전 자이스 콘탁스 III

대부분의 자이스 콘탁스 II/III 애호가들은 소련제 콘탁스 카피인 키에프 카메라를 알고 있다. 하지만 키에프에 대한 상세한 정보는 그리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보통 키에프 카메라는 소련의 저질 표절품 정도로 무시되어 왔다. 일부 냉전에 따른 고정관념의 영향도 있겠지만, 키에프가 실제로 어떤 카메라인가 하는 관심조차도 그리 많지 않았었다.

소련의 붕괴 직후 스웨덴의 한 러시아 카메라 셀러가 키에프의 본질을 매우 적절하게 표현한 적이 있다. “이것은 소련 카메라가 아니라, 소련에서 생산된 독일 카메라이다.” 사실 이 짧은 문장이 이 카메라의 기원에 대한 핵심을 말해주고 있다. 키에프 카메라는 결코 표절품이 아니며, 소련 우크라이나에서 생산된 콘탁스의 합법적 복사품이다. 키에프 카메라는 러시아의 것이라기보다는 자이스의 것이라고 말하는 편이 더 바람직하다.

초기의 키에프

1945년 2차 세계대전 직후, 평화협약에 따라 독일은 전쟁에 대한 배상을 치러야 했다. 잘 알려진 많은 독일 제품 중에서 러시아는 유명한 자이스 콘탁스 II와 콘탁스 III 카메라를 요구했다. 폭격으로 공장이 파괴되기 전까지 콘탁스 카메라는 전후 소련에 점령되는, 독일 카메라 산업의 수도라 할 수 있는 드레스덴의 자이스 이콘에서 생산되었다.

[사진] 1947년 전면에 새로 새겨진 키에프

물론 배상은 스스로 원해서 하는 것은 아니지만 완벽하게 합법적인 것이었고, 러시아는 콘탁스라는 이름만을 제외한 콘탁스의 모든 것을 원했다.

1945년 2월의 연합군 폭격에 의한 드레스덴 공장의 파손으로 인하여, 종전 직후 자이스 이콘은 카메라 생산 프로젝트를 수행할 능력을 대부분 상실하였고, 소련군은 드레스덴 점령과 더불어 남아있는 모든 콘탁스 생산장비와 부품들을 수거하였다.

콘탁스 생산장비와 부품들은 소련으로 보내졌다. 같은 시기인 1945년 말, 자이스 그룹의 핵심인 예나의 칼 자이스는 영업부의 재건과 생산능력의 정상화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회사의 중역들이 소련군 점령 직전에 미군에 의하여 서독으로 이송되었기 때문에, 휴고 박사가 예나를 이끌고 있었다.

동독 소련주둔군은 사업성 있는 몇 개의 프로젝트와 함께 거역될 수 없는 명령을 많이 하달하였다. 그중에 소련 내에 월 5000대의 콘탁스 카메라를 생산할 수 있는 시설을 건설하겠다는 ‘볼가’로 이름 지어진 프로젝트가 있었다. 소련은 드레스덴에서 철거된 생산시설만으로는 이 프로젝트를 수행할 수 없다는 것을 명백히 알고 있었으므로, 콘탁스 생산라인을 속히 재건하고 독일에서 파일럿 생산이 가능하게 하라는 지시를 최고위층인 소콜로프 장군을 통하여 자이스 본사에 직접 하달하였다. 세 개의 완전한 생산라인이 계획되었는데 두 개는 소련이, 하나는 독일에서 자이스가 사용한다는 것이었다. 일급 군수산업체로 분류되어 연합군에 의하여 조인된 얄타조약에 따라 완전히 해체될 수도 있는 위급한 상황 하에 있던 자이스에게 이것은 거부할 수 없는 압력이었다.

휴고 슈라데 박사의 지시에 따라, 전쟁에서 살아남은 볼프강 한이라는 엔지니어가 콘탁스 생산 재건의 책임자가 되었다. 하지만 임무는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었다. 한 대의 콘탁스 III 카메라는 600개의 도면과 730개의 부품에 수반되는 22,000개의 가공치수로부터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한과, 자이스 이콘과 칼 자이스 출신 동료들이 활용할 수 있는 것은 몇 개의 카메라와 24x36 필름에 담긴 몇 장의 도면뿐으로 정확한 치수에 대한 자료는 전무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기적과도 같이 1946년 일년 만에 새로운 콘탁스 생산시설을 건립하는데 성공하였다.

[사진] ‘볼가’로 명명된 프로젝트의 초기 도면

이 결과로 1947년에 공식적으로 약 2000대의 콘탁스 카메라가 예나의 자이스 공장에서 조립되었다. 대다수는 콘탁스 II이었고 콘탁스 III가 일부분을 차지했으나, 굵은 키릴 문자로 새겨진 ‘KIEV’라는 새로운 이름을 가진 것들도 있었다. 또한 알려지지 않은 수의 카메라가 비공식적으로 생산되었는데, 공장 직원들이 부품을 훔쳐 집에서 조립해서 시리얼 번호가 없는 채로 암시장에 내다 판 것들이다. 이런 일들은 어려운 시절에 먹을 것을 마련하기 위하여 공공연히 행해지던 것이었다. 그리고 공장에서도 원료 수급과 기타 편의를 위하여 소련주둔군에 뇌물로 바쳐질 용도로 시리얼 번호 없는, 콘탁스나 키에프만 새겨진 카메라들을 조립하기도 하였다.      

[사진] 예나에서 생산된 플래시 싱크를 갖는 전후 자이스 콘탁스 II    

[사진] 예나에서 조립 중인 키에프 카메라

1947년 10월, 자이스는 완전히 새로 만들어진 세 개의 콘탁스 생산라인을 전쟁에 대한 배상으로서 소련에 납품하였다. 독일에서의 자이스가 사용할 세 번째 생산라인에 대한 소련주둔군의 약속은 협약이 쓰인 종이만큼의 가치도 없었다.  

콘탁스 생산설비의 소련으로의 이전은 계약서에 따라 완료되었다. 그러나 콘탁스 생산라인의 소련 이전 후에도 1950년대 초까지는 한정된 양의 콘탁스 카메라가 예나의 칼 자이스에서 만들어졌다.

[사진] 1947년 ‘Na pamjat' (to remember)가 새겨져 예나에서 생산된 콘탁스 II. 고위 소련 기술자에게 주는 선물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소련에서의 키에프 카메라 생산

1946년 10월, 칼 자이스 예나-콘탁스 프로젝트의 초기 성공 후에 볼프강 한과 몇몇 그의 동료는 소련주둔군에 의하여 우크라이나 키에프의 한 소도시로 재빨리 이송되었다. 새로운 러시아 카메라 생산라인을 건립하라는 명령이 이송 도중에 주어졌으나, 더 이상의 숙련자나 기술자는 이미 가동 중인 칼 자이스 예나-콘탁스 프로젝트로부터 지원되지 않았다. 이와 별도로 키에프에서는 칼 자이스 예나-콘탁스 프로젝트에 의하여 자보드 아스날이란 회사가 첫 번째 생산 훈련을 진행하고 있었다.

키에프의 병력주둔지에 위치한 정부 소유의 아스날 웍스란 회사는 대포 생산을 목적으로 1764년에 설립되었다. 1917년 이후에는 농업용 기계와 장비, 가정용 물품 등을 생산하였다.

전쟁 중에 이 회사는 시베리아로 이전되었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 생산을 계속하였다. 간단한 임시건물을 벌판에 세우고 전기를 연결하여 기계를 가동하였다. 특수한 환경 때문에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전쟁이 끝난 후에 키에프로 돌아올 수 없었다. 자보드 아스날은 완전히 새로 시작해야 했고 새로운 직원들을 처음부터 교육시켜야 했다.  

키에프의 자보드 아스날에 도착했을 때, 볼프강 한과 그의 동료들은 드레스덴의 자이스 이콘에서 철거되었던 기계들이 들어있는 여러 개의 큰 박스를 볼 수 있었다. 장비들의 상태는 좋았고 이송 중에 부서진 것도 없었다. 따라서 콘탁스 카메라 생산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당장 시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과 그의 동료의 대부분은 관리자나 일반 기술자였기 때문에 기계류, 연장, 부품 등에 대하여 그들 스스로 먼저 배워야만 했다.

[사진] 90세 때의 볼프강 한

카메라 생산은 1764년에 지어진 아스날의 가장 오래된 건물에서 시작되었다. 벽의 두께는 1.3미터였고 작은 창문들이 있었다. 장비들은 결코 변경될 수 없을 것 같은 러시아적인 계획에 따라 배치되어야 했으나, 러시아의 관리 시스템에 의하여 설치가 인증된 다음에는 생산에 적합한 위치로 이동시킬 수 있었다.

생산량에 대한 스트레스가 초기에서부터 가해졌다. 독일 기술자들은 공장 내 다른 파트의 노동자들의 기계에 작은 붉은 깃발이 붙여져 있는 것을 보았다. 하나의 깃발은 노동자의 생산 목표량을 달성하기까지 일년이, 두개는 이년이 남아 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한은 그런 시스템이 자이스의 품질기준을 맞추는데 적합하지 않다고 말하였지만, 불행하게도 러시아 관리들은 이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사진] 키에프에서 처음으로 조립된 4대의 카메라 중의 한대 (렌즈와 로고는 나중의 것임)

새로운 직원들이 카메라 생산을 위하여 교육되어졌다. 그들은 키에프 근교의 농촌 거주민으로 아무도 기술적인 지식을 갖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성실하고 열심히 일했으며 독일 기술자들을 높이 받들었다. 치밀하고 단순한 단계별 과정을 도입함으로써 복잡한 카메라의 조립이 마침내 가능해졌다. 수백 대의 카메라가 1946년 말부터 1947년까지 이 교육 프로그램 동안에 만들어졌다. 이 카메라들의 대부분은 드레스덴에서 생산된 부품으로 100% 조립되었으나, 마지막에 조립된 일부의 부품은 예나의 프로젝트로부터 공급된 것들이었다. 카메라의 전면 플레이트는 오리지널 콘탁스였지만 특별한 문자로고가 다시 새겨졌다. 키에프란 문자로고가 전면에 있지만, 뒷면에는 오리지널 콘탁스 글자가 새겨져 있는 것을 아직도 볼 수 있다.

1947년 10월, 예나에서 건립된 세 번째 콘탁스 생산라인이 도착한 후에 총 규모의 생산을 위한 준비작업이 진행되었다. 1948년에는 한정된 물량만이 공장에서 출하되었고, 진정한 대량 생산은 1949년에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최고의 복사품

[사진] 1947년 독일의 자이스 예나에서 제작된 키에프 II

[사진] 1949년 키에프 III

첫 키에프 모델은 콘탁스 II, 콘탁스 III를 따라 키에프 II, 키에프 III로 이름 지어졌다(나중에는 키에프 2, 키에프 3가 되었다). 이 카메라들은 콘탁스 카메라의 모든 세부적인 것들의 진정한 복사본이었다. 생산 초기에 자보드 아스날의 야망이 매우 컷 던 것이 분명하다. 카메라의 외관뿐만 아니라 재료의 선정과 기계적 구성도 실질적으로 콘탁스와 동일하였다. 셔터와 필름이송 파트를 초기 키에프와 콘탁스에서 각각 분리하여 같이 놓았다면, 그 둘을 구별하여 분리해내기 위해서는 숙련된 전문가의 세밀한 관찰을 필요로 할 것이다. 그러므로 초기 키에프와 콘탁스의 부품은 대부분의 경우에 서로 교환사용이 가능하다.  

하지만 자이스 콘탁스 II/III와 키에프 카피 사이의 한 가지 기능적인 차이점을 찾아 낼 수 있다. 두 시스템 사이에 호환성은 있지만, 자보드 아스날은 렌즈의 백 포커스, 즉 렌즈와 필름 플레이트와의 거리에 관한 높은 수준의 자이스 정밀도를 맞추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키에프 카메라는 실제로 오리지널 콘탁스보다 약간 긴 백 포커스를 가지고 있다(피사체 앞쪽보다 뒤쪽의 심도가 더 깊기 때문에, 만약 낮은 수준의 정밀도를 선택한다면 이것이 최선의 방법일 것이다). 이런 일과 또 일어날 유사한 행태들은 키에프의 전 생산기간에 걸쳐 영향을 주었고, 키에프 생산에서 근본적인 문제들을 발생시키게 된다.

[사진] 렌즈와 필름 플레이트 사이의 거리에 대한 자이스 표준 (35mm +0.01mm/-0.03mm)

모순되는 목표

1945년 9월에 소련주둔군이 처음 자이스 이콘에 콘탁스 생산에 관한 러시아의 계획을 전달했을 때, 소련의 계획은 소련 내의 적당한 지역에서 월 5000대의 카메라를 생산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1936~1943년 사이의 자이스 이콘 생산능력의 약 5배에 달한다. 동시에 콘탁스와 같은 품질의 복사품을 만드는 것이 요구되었다. 이런 계획의 목표는 달성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카메라의 대부분은 수작업으로 제작되고, 그 시대에 높은 품질의 제품 생산은 조립과정에서 긴 시간이 소요되는 수공 개선작업과 점검작업 등의 많은 단계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이런 미묘한 특성이 있는 생산에서 노동력을 두 배로 늘인다고 생산량이 두 배로 증가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시스템에 효율적으로 투입될 수 있는 인력의 수에도 한계가 있다. 이미 그 한계에 도달하였다면, 생산량을 증가시킬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은 생산 공정을 단순하게 만드는 것이다.

기계에 붙여진 붉은 깃발이 대변하는, 정치적으로 하달되어진 생산량에 대한 압력으로는 해결 난망의 모순된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첫 생산기

1950년대 초반기에는 키에프의 생산이 대략 전전의 자이스 이콘 수준으로 제한된 것으로 보인다. 출시된 카메라는 높은 품질의 제품이었고 소련의 고위층만이 구입할 수 있었으며, 과시용 수출 품목이었다. 오늘날 이런 사실은 많은 수집가들에 의해 확인되어, 상태 좋은 키에프 II와 키에프 III는 콘탁스와 비슷한 값에 거래된다.

1954년, 자보드 아스날은 소량의 플래시 싱크 키에프 2의 시험생산을 시작하였고, 1956 중반에 공식적인 양산에 돌입했으며, 이들 카메라는 키에프 2A와 키에프 3A로 명명되었다.

[사진] 1956년 전당대회 기념 키에프 3A

이 시기의 생산량 증대에 관한 압력의 결과는 미세한 부분에서 나타난다. 되감기 놉의 화살표에서 깃털모양이 사라지고, 셔터 릴리즈 놉 주위 부분의 크롬도금 전 연마과정이 생략되었다. 생산품의 약 90%가 높은 품질을 가졌던 1950년대 말에 자보드 아스날은 월 약 3500대의 생산력을 갖게 되었다.

서독의 이웃 따라잡기

1950년대에는 슈투트가르트의 자이스 이콘에서 생산된 콘탁스 IIa와 콘탁스 IIIa가 카메라 시장에서 가장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자보드 아스날은 서독 경쟁자의 모습에 영향을 받아, 1957~58년에 기존의 키에프 2A와 키에프 3A 생산과 별개의 새로운 키에프 카메라 프로토타입을 설계한다.

새 카메라는 콘탁스 IIIa와 같은 외관의 노출계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내부 기능은 구식의 것과 같았다. 사실 그것은 키에프 3A 노출계의 단순화된 소형판에 불과했으나, 그 때문에 생산량을 더 증대시킬 수 있었다. 새 카메라의 뒷면은 모양과 제작기법에서 콘탁스 IIa, 콘탁스 IIIa와 같았으나, 그리 현명한 개선이 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콘탁스 II/III의 필름 플레이트에 콘탁스 IIa/IIIa의 커버를 사용하는 결과를 낳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생산 개시 몇 년 후, 특히 필름 플레이트에 있는 여분의 수직 스프링을 생략한(후기의 콘탁스 IIa/IIIa와 같이) 후에 필름의 편평도에 문제를 일으켰다. 공식적인 생산은 1960년에 시작되었고, 카메라의 이름은 키에프 4와 키에프 4A가 되었다. 이때부터 ‘A’는 노출계가 없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사진] ‘No Name' 키에프 4A

‘No Name 콘탁스’로 잘못 불려지는 ‘No Name’ 키에프 4A는 1963/64에 생산되었다. 이들은 바디 전면 좌측에 플래시 싱크를 가지고 63/64로 시리얼 번호가 시작하는 키에프로서 구별된다.

1960년대에는 가장 심각한 품질문제가 부주의한 조립과 불량 부품의 사용으로 인하여 발생하였다. 그럼에도 생산품의 80% 가량이 여전히 콘탁스와 같았다. 생산 공정의 단순화는 계속되었고, 1964년 베이요넷 드럼 측면의 거리표시 인쇄가 생략되었다. 1966년경부터 파인더의 접안렌즈가 더 이상 조절되지 않았고, 이는 나중에 스플릿 이미지의 선명도에 문제를 발생시켰다.

현대화 프로젝트

1968~69년에 자보드 아스날은 정상적인 생산 외에 이전의 콘탁스 스타일로부터 많이 변형된 외관을 갖는 실험적인 카메라를 출시한다. 그것은 키에프 5로 크고 밝은 파인더와 50미리 표준렌즈를 위한 프레임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바디 안에 집적된 노출계가 있었고 필름이송은 레버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불행하게도 이 카메라는 무겁고 불편했으며, 공산체제인 소련의 매우 통제된 시장에서조차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소련의 생산체제 하에서 키에프 5는 작동하는 카메라를 구입하기 어려울 정도로 꽤 복잡한 카메라임이 밝혀졌다. 키에프 5의 생산은 1970년대에 점차 줄어들다 중단되었다. 키에프 5는 오래 동안 콘탁스 스타일의 대명사격이었던 포커싱 휠과 무한대 고정기능을 생략하였고, 50미리 렌즈를 바깥 베이요넷 마운트에 장착하였으나 다른 키에프나 콘탁스 렌즈와는 호환되지 않았다. 이송 레버는 부실하여 레버보다는 놉으로 필름을 돌리는 것이 차라리 나았다.  

[사진] 1971년 제작된 시험판 Record-4 52/0.9 렌즈를 장착한 키에프 5. 생산되었으면 최초의 풀 프레임 레인지파인더 렌즈가 되었을 것이다.

끝없는 품질 저하

키에프 5 대신에 자보드 아스날은 이전 키에프의 새로운 모델로 돌아간다. 이 모델들은 특별한 모델명이 없지만 키에프 4 모델(타입) 2와 키에프 4A 모델(타입) 2로 불릴 수 있다.

이제 가죽으로 된 바디의 커버는 합성 직물의 선호로 포기되었다. 전면 플레이트는 새로운 모양을 가지고 메인 휠 부분(전면의 우측 부분)의 돌출부를 가리게 되었는데, 이로써 조금 딱딱한 합성 직물을 붙이기가 쉬워졌다. 최고 셔터속도는 1/1000에서 1/1250으로 대체되었는데, 이 때문에 조립공정에서 조정 시간을 상당히 줄일 수 있었다. 이러한 변화들은 1973~1979년 사이에 점차적으로 도입되었다.

새로운 모델에서의 가장 큰 변화는 키에프의 전 역사에서 가장 크게 저하된 품질이었다. 이는 조립이나 재료의 선정의 변화에 따른 결과라기보다는, 부주의한 조립과정과 불량 부품의 채용에 의한 영향이 크다. 또한 부품의 단순화 작업이 계속되어, 거리표시 부분이 크롬도금 전에 더 이상 연마되지 않았고 인쇄는 조잡해졌다. 이는 카메라 전체를 보기 싫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 시기가 1946~47년에 칼 자이스 예나에서 교육받은 기술자들이 은퇴한 시점이라는 사실도 흥미롭다.

조립상태의 불량 때문에 키에프 카메라의 가장 이채로운 점이 드러났는데, 모든 부주의한 조립과 불량 부품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카메라가 쓸만한 허용오차 내에서 아직도 작동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기구의 기초 컨셉이 초창기에 너무나 잘 설계되어져 완벽하지 않은 조립과정에서 오는 오차가 극복되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1930년대 자이스의 설계자와 제작자였던 하인츠 퀴펜벤더 박사, 엠마뉴엘 골드베르그 교수 그리고 후베르트 네르빈 아래의 자이스 이콘 제작부의 위대한 공로의 덕이다.

[사진] 백만번째 키에프로 1975년의 키에프 4 모델 2. 오리지널 콘탁스보다 훨씬 많은 수의 키에프가 생산되었다.

마지막 생산

1960년대와 마찬가지로 1970년대 중반에도 새로운 모델의 키에프 카메라가 제작되었다. 1976년에 키에프 4와 키에프 4A의 모델 2 생산과는 별개의 시험생산이 있었다. 이 시험 버전은 희한하게도 크롬 전면 플레이트에 상부는 블랙 페인팅이 되어 있어 키에프 블랙 & 화이트로 불리어진다. 기능적으로는 확장된 직경의 블랙 필름이송 놉과 플래시 핫 슈, 붙박이 필름스풀, 리와인드 크랭크, 카메라 뒷면의 잠금 크랭크에 의하여 필름이송 휠이 자동으로 릴리즈 되는 것 등이 새로워졌다. 새 모델은 키에프 4M과 키에프 4AM으로 이름 지어졌고 공식적으로 1979년부터 생산되었다.

[사진] 1976년의 키에프 블랙 & 화이트 프로토타입

이 무렵은 자보드 아스날의 직업정신이 가장 저급해진 시기이다. 상당수의 카메라가 공장에서 출하되는 시점에서 전혀 작동하지 않았다. 미확인된 소문에 따르면, 1981년에 모스크바 중앙정부에서 파견된 관리가 불시에 키에프의 자보드 아스날에 와서 지난 2개월 동안의 생산품을 모두 불량 처리하여 부수고 곧바로 쓰레기로 내보냈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 때문에 소련에는 전문 수리점들의 네크워크가 형성되어 있다. 먼저 사회주의적인 싼 값으로 카메라를 사고 난 후 카메라가 완벽하게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어 전문 수리점에 들러 수리비를 지불하고 나면, 이에 따른 총 비용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비슷한 타입의 카메라를 사는 비용과 비슷해지는 것이다.  

1982년부터 자보드 아스날은 품질을 약간 향상시켰다. 그래도 월 5000대의 원 생산계획을 달성했으니 콘탁스의 품질과는 거리가 멀었다. 1986년에 마지막 키에프 4M과 키에프 4AM이 출하되었다.

이 카메라가 콘탁스 II로서 1936년에 처음 출시된 것을 생각하면, 원칙적으로 같은 제품이 반세기동안 생산되었다는 것은 아주 굉장한 기록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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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아이비의 플래닛
글쓴이 : 아이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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