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일 전쟁 1.암운(暗雲)이 드리운 동북아의 하늘
헨리 정(정영진, 재미 칼럼리스트)
역사의 수레바퀴는 어김없이 돌아가고 20세기의 여명이 열렸다.
국제사회는 급물살을 이루며 눈을 무릎 뜨고 자국의 세력 확장에 혈안이 되고 있었다.
극동지역의 대립관계는 궁극적으로 중국의 분할경쟁이었고 그 가지에 속하는 조선반도를 누가 선점하느냐 이었다.
제국주의 국가 간의 힘의 확장 과정에서 생긴 열강의 각축장은 마침내 극동에 다 달렀고 자국의 이권과 상대국가의 야심을 누루기 위한 힘겨루기가 조선반도 주변에서 그 대결의 촉발을 예고하고 있었다.
19세기말부터 괄목할만한 근대화와 눈부신 경제성장에 힘 입은 일본은 세계적 규모의 제국주의 단계에 들어섰다.
하지만 신흥 일본은 쓸개를 곱씹을 만치 분에 찬 속앓이를 가눌수 없어 이를 갈고 있던 참이었다.
동학혁명이 일어나고(1984) 그 반란을 진압한다는 구실로 조선반도에 출병한 일본군이 자기네 속국이라고 우기고 조선 땅에 발 딛인 청국군과 맞서 싸워 이긴 다음에(1894~1895)
일본의 필연적 과제인 조선 반도 강점의 수순을 밟고 있었다.
청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의 전리품으로 대만과 요동반도를 청국으로부터 얻게 되었으나
요동반도만은 러시아, 프랑스, 독일 삼국의 간섭으로 그 땅을 차지하지 못하고 억울하게도 되돌려 주어야 하였다. 차지하지 못한 것만도 분통이 터지는데 오히려 상대국인 러시아가 시베리아 철도의 연장선으로 만주에 철도를 관통하겠다고 나서며 철도 부설 주변 보호라는 명목으로 출병까지 하지 않는가?.
러시아의 꿈은 남진, 남진하며 꿈에 그리는 부동항을 찾는 일 이었다. 그래서 여순항을 자기네 이름인 Port Arthur라고 이름 짓고 거기를 동남아 진출의 거점으로 삼으려고 했던 것이다.
우리는 기하시간에 배웠다. 점과 점을 잇는 것을 선(線)이라고 했다. 그 선을 한바퀴 회전하면 평면이 된다는 원리-
여순항에 다가 점을 찍어 점과 점을 잇기만 하면(철도 부설) 임자 없이 방치된 대지 만주 땅은 러시아 영토가 되는 셈이다.
그것뿐이 아니었다.
조선반도는 일본이 진즉부터 점찍어 놓은 자기의 먹이감으로 기회를 보아 합병하고 대륙 진출의 발판을 삼으려 했던 것이다(征韓論)
조선을 식민지화 하기만 하면 거기에서 산출되는 곡식, 지하자원, 누에고치 옷감(비단)등은 일본 경제에 활력이 될 뿐 아니라 장차 수출 시장으로도 몫 좋은 소비시장이 될 것임으로 일본 정부가 가장 눈독 드린 목적지 이었다.
그런데 구한말 고종이 아관파천(俄館播遷) 한 이후 궁내의 수구파들이 러시아에 밀착하는 낌새가 많았고 러시아는 조선으로부터 광업권이네 장차 철도 부설권 같은 이권도 챙기려고 손을 뻗고 일부 일본 정보에 의하면 군대를 이미 압록강 넘어 용암포에 까지 들여 보내어 39도 이북을 아예 점령해 버릴 려는 속셈까지 알아내게 되었다.
그러니 일본으로서는 자기의 대륙 진출의 꿈이 모두 무산되고 러시아에게 모든 걸 빼앗기게 되겠다는 초조감에 러시아와는 무력 대결이 불가피하다는 개전론이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다.
“만주도 빼앗기고 조선도 내 주어?, 그게 아니지-.”
독자적인 힘으로는 거인 러시아와 싸울 자신은 없었지만 위기감을 느낀 일본은 국력을 키우며 내심 칼을 갈고 있었다.
청일전쟁에서 이겨 전쟁 배상금으로 받은 3억6,000만엔 중 2억2,000만엔을 군비 확장에 투자하고 당시 국가 예산 중 절반을 국방비에 지출하는 등 온 힘을 전쟁 준비에 쏟아 부었다.
거인 러시아의 팽창에 겁먹은 영국과 북극곰의 확장을 못 마땅하게 여긴 미국이 일본을 은근히 부추기고 있었다.
일본은 영국과 미국을 대신해서 스스로 러시아의 남진 정책에 쐐기를 박고 말겠다고 총대를 멘 것이다.
일본은 영국, 미국으로부터 외교적 지원을 받을 뿐 아니라 러일전쟁에 쓰일 전쟁 비용 17억엔 중 8억엔을 외채로 보충하게 되었다. 최신 군함도 대부분 영국에 주문, 그곳 조선창에서 건조되었고 영국 사관들이 기술 훈련까지 전수시켜 주었다.
영국과는 영일(英日)동맹이 공개적으로 체결되었고(1902), 미국은 가시적인 군사원조는 안해 주었지만 이미 일본을 정신적으로 돕겠다는 후견인 노릇을 하고 있었다.
러시아군의 전체 지상군의 규모는 일본에 비교해서 엄청나게 많았지만 8000km에 달하는 시베리아 횡단 철도가 아직 완성되지 않아 그 군사력은 커다란 압력이 될 수 없었으며 극동지방에만은 135,000여명이 만주, 흑룡강 이북, 연해주등에 분산, 주둔하고 있어 그 병력의 기동력과 군수 보급이 열악한 상태라고 일본 수뇌부는 평가하고 있었다.
반면 일본은 총 85만 명의 훈련된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그 중 15만 명의 무장 병력은 즉시 전투에 투입 될 만치 준비된 전투력이 만만치 않았다.
러시아의 해군은 일본 해군력에 비해 3배나 양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었지만 주력인 발트함대는 지구의 정 반대편인 북대서양에 버티고 있어 그 막강한 해군력은 극동에 미칠 수 없었고 명성을 떨치던 흑해함대는 지정학적으로 그 출동에 제한을 받고 있었다.
극동지방에 진치고 있던 러시아 태평양함대는 정예화 된 일본 해군에 비해 좀 낙후된 데다가 여순항과 블라지보스톡항 양켠으로 갈라져 있어서 그 힘이 분산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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